[플루타르크 영웅전] 포플리콜라

2020. 9. 14. 01:02흥미/역사

포플리콜라(시민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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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우스와 당시 시대적 배경

포플리콜라의 본 이름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였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포플리콜라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는 웅변과 재산으로 매우 이름이 높았던 사람으로, 항상 정의의 편에 서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당시 로마는 혼란에 빠져 어지러웠던 시기였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폭력을 써서 왕위에 올라 포악한 독재를 하고 있었기에 민중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타르퀴니우스의 왕자에게 루키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겁탈을 당하고 자살하자, 민중들은 독재 정치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 때 루키우스 브루투스는 발레리우스를 찾아가 그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왕을 내쫓았다. 민중들은 왕의 지배를 원치 않았으므로 통치권을 나누어 집정관을 두 사람 뽑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콜라티누스는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으로, 공적보다는 쫓겨난 왕이 로마로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분노한 그를 뽑은 것이었다. 선왕인 타르퀴니우스는 이전의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기만적인 조건을 내세워 국민을 현혹한다. 이 때 발레리우스는 그것에 반대하며, 백성들은 독재 정치보다 전쟁을 더 두려워하므로 그들의 제안에 넘어가면 안된다고 한다. 또한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버리고 전쟁도 안하겠다며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시민들은 이 때문에 큰 집회를 열었는데, 사실 타르퀴니우스는 백성들의 감정을 알아 보고, 로마에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


로마의 7왕 시대가 끝이 나는 시점이다. 이러한 과도기적 시대에 태어난 발레리우스는 어떻게 보면 올바른 시대에 잘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발레리우스는 집정관에 뽑히지는 못했지만 명성이 높았다. 그가 섭섭해 정치적 일에 잠시 물러나자, 사람들이 그가 왕의 편에 가담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고 한다. 이러한 견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은 인정받은 것 같다.


반역자 처단과 집정관

타르퀴니우스는 이 때 로마의 두 이름난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아퀼리우스 가문은 원로원 의원이 3명 있었고, 비텔리우스 가문에는 원로원 의원이 2명 있었다. 비텔리우스가의 사람들은 타르퀴니우스와 협력하면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브루투스의 두 아들을 꾀어내었다. 두 청년이 아퀼리우스 가문 사람들과 모여 음모를 꾸미기 위해 은밀한 곳을 장소로 했다. 하지만 이 때 빈디키우스라는 시종이 음모를 듣게 된다. 그 내용은 그들이 두 집정관을 암살하고, 밀서를 타르퀴니우스에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빈디키우스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아버지인 브루투스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집정관 콜라티누스에게 고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언제나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갑게 맞이해주는 발레리우스를 떠올렸다. 그렇게 빈디키우스의 이야기를 듣고, 발레리우스는 동생 마르쿠스에게 밀서를 압수하고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퀼리우스 집에 가서 타르퀴니우스가 보낸 편지를 압수한다. 그리고 재판이 시작된다. 증거가 확실해 반역자들은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브루투스를 동정하여 그의 아들들을 추방하는 데만 그치자고 한다. 콜라티누스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고 발레리우스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브루투스는 두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티투스, 그리고 티베리우스, 왜 아무 변명도 없느냐"하고 세 번이나 되풀이해 물었으나 아들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청년은 피가 나도록 매질을 당하고 도끼로 목이 잘린다. 브루투스는 그 모든 장면을 똑바로 서서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브루투스의 이런 행동은 최고의 칭찬과 함께 최대의 비난을 받았다. 아퀼리우스 가문은 변호할 시간을 달라고 하며, 자기 집의 종인 빈디키우스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발레리우스는 거절한다. 그리고 콜라티누스는 아퀼리우스 가문의 요구를 들어주려하고 집회를 해산하려 했는데, 이로인해 집정관으로서 신망을 잃는다. 그는 지위에서 물러나 로마를 떠나게 되고, 콜라티누스의 보궐 선거에서 발레리우스는 집정관이 되었다.


발레리우스는 인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시종인 빈디키우스를 돌려주지 않았는데, 그의 신변을 보호하려한 것 같다. 이번 반역자 사건으로, 브루투스는 안타까운 일을 겪는다. 아버지로써의 자상함보다는 집정관으로써의 명예를 선택한 것 같다. 음모 내용이 집정관을 살해하는 내용으로, 어찌됬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 반대가 벌어졌을 것이다. 골육상잔의 내용이 꼭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는 것 같다.


브루투스의 죽음

발레리우스는 노예였던 빈디키우스의 공을 생각해 그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다. 타르퀴니우스 왕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왕위를 찾으려다 실패한 뒤 토스카나로 갔다. 사람들은 그에게 왕위를 다시 찾도록 군사를 빌려주기로 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고, 로마의 두 집정관은 아르시아 숲과 아이수비아 풀밭에 진을 쳤다. 전쟁에서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와 집정관 브루투스는 결투를 벌였다. 두 사람은 결사적으로 싸우다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양쪽 군사의 손해가 막심하였는데, 로마군보다 토스카나 군의 전사자가 한 사람 더 많다는 음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이에 관해서는 신의 음성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쨌든 로마군이 사기가 올라 결국 승리하였다.

발레리우스는 개선 행진을 하고 동료 집정관인 브루투스를 위해 장례식을 올리고 추도 연설을 하였다. 이 때부터 유명한 명사가 추도 연설을 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하지만 이 시기 이후 발레리우스에게 국민들의 반감을 사는 일이 생긴다. 발레리우스가 혼자 집정관을 하며, 왕궁보다도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타르퀴니우스와 같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발레리우스는 하룻밤 사이에 화려한 집을 허물어뜨렸다. 살 집이 없어진 발레리우스에게 로마 시민들이 작은 집을 주어주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는 똑똑한 사람이다. 브루투스의 죽음도, 신의 음성도 그가 준비한 전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국민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권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포플리콜라의 정책

발레리우스는 왕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끝에서 도끼를 빼내는 등 국민을 주인으로 한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의 권력은 축소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권력을 없앴지, 실질적인 권력은 더 확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러한 점을 알지 못했고, 그를 존경하는 마음에 존경과 만족을 나타내기 위해 포플리콜라,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먼저 사형당하거나 전쟁으로 결원된 원로원 의원을 다시 164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국민의 자유를 확대하는 몇 가지 법률을 만들었다. 피고가 집정관의 재판 결과가 억울하다 했을 때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법도 있었다. 관리들의 관직을 빼앗을 때에는 반드시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야했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면해주었다. 집정관에게 반항하는 자를 벌하는 법률은 평이 좋지 않았으나 벌금을 돈이 아닌 가축으로 정하여 귀족보다 평민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왕의 자리를 넘보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재판없이 바로 사형해도 좋다는 무서운 법률도 있었다. 국가의 경제에 관해서는, 시민들에게 거둔 전쟁 군자금을 사투르누스 신전에 보관하였다. 이 신전을 국고로 지정하고 두 청년을 뽑아 지키게 했다. 이 세금은 13만 명의 사람에게 징수했는데 고아와 과부를 제외시키고도 막대한 액수였다고 한다. 


포플리콜라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많이 제정했다. 그와 별개로 그의 권력을 축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집정관에게 반항하는 자를 벌하는 법도 있는 것을 보아 누군가를 견제하려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포플리콜라는 막강한 권력을 갖는 것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는 적어도 그러한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았다. 의도가 어찌됬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법률을 통해 전제 군주제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포르센나 왕과의 전쟁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아들이 브루투스와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클루시움으로 갔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대했던 라르스포르센나 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두 나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포플리콜라는 포르센나를 속이고 로마의 당당한 정기를 보여주기 위해, 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글리우라 시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 같은 일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포르센나는 로마 시를 점령하기 위해 몰려왔다. 로마 군인들은 심한 부상을 당했으며, 포르센나는 몇 번이고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 사람들은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고, 토스카나 군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 포플리콜라는 수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군대를 이끌고 토스카나 군을 습격해 적군 5천 명을 죽이고 돌아왔다. 이 싸움과 관련하여 무키우스라는 용감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무키우스는 용감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포르센나를 암살하기 위해 토스카나 사람처럼 꾸미고 적진에 숨어들어갔다. 그는 포르센나왕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가장 왕같아 보이는 사람을 칼로 내리쳐 죽이고 붙잡혔다. 무키우스는 심문을 당하게 되는데 오른손을 화롯불에 집어넣고 손이 불에 타들어가도 태연하게 포르센나 왕을 노려보았다. 왕은 그 용기에 놀라 그를 살려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왕의 무서움에는 이겼지만 그 아량에는 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300명의 로마 결사대가 주위에 잠복하고 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제가 이 일을 맡게 되었으나, 실패했다고 서운하게 생각지는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용맹스럽고 위대한 왕이시며 로마의 적이 아니라 벗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포르센나 왕은 휴전을 결심한다.

포르센나는 로마와 화해를 하여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 주었다. 군대를 철수시킬 때, 무기 외에 식량과 그 밖의 군수품은 모두 로마 사람들이 가지도록 남겨두었다.


전쟁과 평화

그 후 사비니 족들이 로마 영토를 침략해왔다. 그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다시 사비니 족과 라틴 족의 연합군이 로마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사비니 족 중 뛰어나지만 전쟁을 중지하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의심을 받고 있는 아피우스 클라우수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포플리콜라는 클라우수스를 로마로 초대하였고 그는 자신의 동지와 가족들 5천 명을 데리고 로마로 망명했다. 포플리콜라는 그들에게 시민권과 땅을 주었으며, 클라우수스에게는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주었다. 클라우수스는 로마에서 훌륭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로마는 양동작전을 통해 사비니 군을 몰아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포플리콜라는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개선식을 올리고, 자기 다음으로 집정관이 될 사람들에게 나라 일을 맡긴 후, 세상을 떠났다. 로마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동안 드렸던 존경이 모자랐다는 듯, 그의 장례식을 매우 성대하게 치렀다.


포플리콜라는 유망한 인재인 클라우수스를 얻게 된다. 전쟁의 승패를 내다본 점에서 클라우수스는 현명했고 포플리콜라는 전쟁에서 더 유리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에서 이긴 뒤, 포플리콜라는 정계에서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이 어떤 식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 번째나 선출된 집정관을 마치고, 집정관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국민들은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그가 '포플리콜라'에 맞게 진정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에게 사랑받은 것 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