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누마 폼필리우스

2020. 9. 6. 02:06흥미/역사

로마의 두번째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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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 사후

로마 건국 37년이 되던 해에 로물루스가 갑자기 염소 늪에서 사라지자, 로마는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한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 귀족, 평민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왕을 세우려고 노력했고, 로마 원주민사비니 족 사이에서도 갈등이 이어졌다.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 많은 분열이 일어났다. 결국, 15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교대로 왕의 업무를 수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런 정부의 형태를 인테르레그눔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체제에 대해서도 의심이 이어졌고, 결국 두 종족은 각자 상대방의 사람들 중에서 왕을 뽑기로 결심한다. 이 때 사비니 족은 로마인들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로마 사람들은 사비니 족이 뽑은 로마 사람보다, 자신들이 사비니 족 중에서 왕을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누마 폼필리우스를 왕으로 결정했다.


로물루스가 갑자기 없어졌기 때문에 로마는 혼란스러워졌다. 로물루스의 부재로 이렇게 되는 것을 보면, 이전의 로마는 왕에 의지하는 체제의 국가였던 것 같다.


누마 왕이 되기까지

누마는 당시 로마에 살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인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매우 지혜로웠고, 성격이 어질고 용기 또한 강했다. 오락과 제물, 사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에 대한 기도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이어서, 타티우스가 외동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을 정도였다. 그는 타티우스 왕의 사위가 되어도 여전히 평범하게 살았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뒤, 누마는 한적한 농촌에서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로마의 대표자들은 누마에게 왕을 권했으나 누마는 거절한다. 그는 한 인간이 자기의 생활을 갑자기 바꾼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며, 로마는 용맹스러운 왕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런 사람이 못된다고 한다. 누마의 아버지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누마를 조용히 딴 방으로 데려갔다.

 

"너는 부족한 것이 없어서 부자도 되기 싫고 훌륭한 덕으로 이름이 났으니 남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명예를 얻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신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고 너의 재능은 결코 세상에 불필요한 것이 아니란다." (중략)

"승리를 맛본 국민들은 이제 전쟁에서 얻는 전리품에 만족하고 있고, 지금은 정의와 평화를 지켜줄 왕을 원하고 있다. 또 만일 로마 국민들이 여전히 전쟁을 일삼는다고 해도, 그들의 사나운 마음을 부드럽게 어뤄만져 주는 것이 왕의 할 일 아니겠느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누마는 왕이 될 것을 결심한다.


누마는 어진 품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재물과 지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았던 사람인 것 같다. 이러한 계열의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정말 힘든데, 이것을 누마의 아버지가 해낸다. 폼펠리우스 가문의 지혜가 느껴지는 설득이다.


누마 왕의 시대 (정책 part1)

누마가 왕이 되어 처음 한 일은 로물루스의 호위병을 해산시킨 일이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제관을 추가했다. 그는 국민들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제사마다 춤을 곁들인 행사를 벌이고, 오락을 섞었다. 때로는 기괴한 징조가 보인다는 소문을 일부러 퍼뜨려, 사람들의 두려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마음을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또한 누마는 제사 때 산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금하고, 밀가루나 포도주 등의 값싼 제물을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사제 제도 또한 누마 왕이 처음 만들었으며, 스스로가 최초의 사제였다. 사제는 '폰티피케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불가능한 경우는 예외'라는 뜻으로 힘이 미치는 데까지 모든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베스타 처녀와 영원한 성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처녀들이 성화를 지키게 하는 제도이다. 왕의 명령으로 베스타의 처녀는 30년 동안 처녀를 지킨다는 선서를 해야했다. 10년간은 일을 배우고, 10년 동안은 직접 임무를 수행하여 나머지 10년 동안은 어린 처녀를 가르치게 되어 있었다. 30년의 임무가 끝나면 그들은 원하는 생활을 할 수 있고 결혼도 허락되었다. 누마는 그들에게 특권을 주었다. 유서를 작성할 수 있고, 후견인 없이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외출 시 시종이 호위를 해주었다. 선서를 지키지 못하고 처녀성을 잃은 여자는 콜리나라는 문 근처에 산 채로 매장당했다.


누마는 어진 왕이라고 전해진다. 그 당시 로마 인들은 열에 들떠 있었고, 그는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 그들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안좋은 소문을 퍼트리는 방식을 사용한 걸 보면, 어진 성품과 솔직함은 별개인 것 같다. 누마는 특히 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었는데, 왕이 된 뒤 신을 섬기는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왕이 사제였다는 것은 놀라운데, 이 당시 왕이 종교적 힘까지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발칙한 상상이지만, 누마가 신을 안 믿는 사람이었어도, 독실한 척을 했을 것 같다. 시민들은 믿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한데, 이러한 '신'은 통치적인 면에서 너무 좋은 컨트롤러이다. 로물루스의 어머니가 베스타 신전의 사제인 것을 생각해보면, 베스타의 처녀는 이쪽(알바롱가)에서 따온 제도인 것 같다. 베스타의 처녀들은 대체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30년간 전혀 다른 삶을 살아버리면,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잔혹한 미신의 피해자라고 생각돼 안타깝다.


누마 왕의 시대 (정책 part2)

누마는 여러 제관의 계급 제도를 만들었다. 그 중 '페키알'과 '살라이'가 인상적이다. 페키알 제관은 평화의 감독자로 대화나 논의에서 생기는 싸움을 중재, 판결해 주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그릇된 일을 하는 나라에 찾아가 충고하는 일도 하였다. 페키알들이 금지하거나 찬성하지 않을 때는 로마의 군대나 왕도 무기를 들 수 없었다. 살리이라는 사제는 방패를 지키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이와 관한 스토리가 있다. 누마가 왕위에 오른지 8년 째 되던 해, 이탈리아에 전염병이 퍼졌다. 이 때 하늘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진 방패가 떨어져 누마 왕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여신 뮤즈가 그 방패는 로마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니, 잘 보존하기 위해 크기가 똑같은 열 한개를 만들어 도둑이 가져가도 구별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열 두개의 방패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리이가 임명되고 전염병은 물러났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페키알 제관의 존재가 아이러니하다. 평화의 감독자로써 엄청난 권한이 부여되는 것 같으며, 심지어 '페키알들'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한 명도 아니다. 이 페키알 제관으로 인해 왕권에 큰 타격이 있지 않을까? 누마 왕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였고, 누마가 현명한 왕이었기에 그런 일은 없었다. 나중에 로마 왕국이 무너지는데 이러한 정책이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살라이는 재미있는 사제 지위이지만, 방패를 들고다니는 것 외에 실제로 무엇을 했을까 싶다.


로마에 평화를 가져온 왕

누마는 영토에 경계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누마는 로물루스가 점령했던 땅을 가난한 평민들에게 나눠주고 땅에 경계를 만들어 이를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농업을 장려했는데, 경제적 이익보다는 국민의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마는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나눠 조합을 결성했다. 이를 통해 두 종족(로마 원주민, 사비니 족)의 구분이 없어져 사람들은 점차 융화되었다. 누마의 정책 중 중요한 것으로, 아버지가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는 로물루스의 법률을 고쳤다. 야누스의 신전은 로마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의 얼굴처럼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전쟁의 문이라고 부르는데, 전쟁이 났을 때 열러 놓고 평화로울 때는 닫아 두었다. 이 문은 누마가 왕이 된 뒤, 43년 동안 단 하루도 열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역사가 피소의 말에 따르면, 누마는 팔십이 넘도록 살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직업에 따라 사람들을 융화시킨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로마 원주민과 사비니 족이 융화한지 37년이 넘었음에도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는 터질 화산이었다. 직업별로 만남을 계속 가지게 된다면, 시민들의 생산력 또한 증가할 것이다. 누마왕은 이탈리아 반도에 평화를 가져온 왕이었다. 그의 사후에 5왕을 거친 뒤, 로마 왕국은 무너지고 공화국이 탄생한다. 누마왕이 없었다면 로마라는 이름도 남지 않았을 것 같다. 로마가 탄생한 것이 로물루스 덕분이라면, 존속된 것은 누마 폼필리우스 덕분일 것이다.